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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학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돈이 없었다. 쌔빠지게 군대에서 몸만 썼더니 빡빡 밀린 머리털만큼 속에 든 것도 날아갔을뿐더러, 원래부터 경쟁이 심했던 기숙사는 남는 자리 하나 없이 꽉 찼다. 학교 주변에서 가장 가까운 집에 들어서자 당장 집세를 낼 생각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일을 시작하면 그나마 자랑거리였던 학점이 반타작이 날 것이다.

 

부모님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민규는 자기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다. 천하의 불효자 새끼, 앞가림도 못 하는 새끼! 등록금 받는 것도 감지덕지야, 더 손 벌리면 사람 새끼냐?

 

  -

 

산허리에 있는 대학이다. 그렇게 오래된 학교가 아닌데 열 몇 학번 정도 전부터 ‘전통적’으로 쓰이는 몇 가지 은어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학교 주변의 빌라 단지 중 가장 가까운 대여섯 개의 ‘빌라촌’, 그리고 기숙사생들도 빌라촌에 사는 사람들도 제2의 집처럼 이용하는 세 개의 편의점들이 ‘삼국’, ‘삼원색’, ‘빨노파’ 등으로 파생된 단어들이 그것이었다.

 

대학의 명물이 될 정도로 유명했던 이유가 다름이 아니라, 예의상 대각선으로 몇 걸음씩 떨어져 있을 법도 한데 종류가 다른 세 개의 편의점이 나란히, 그것도 7년 가까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편의점 주인들도 모두 달랐다. 상가라고 불리기도 부끄러운 1층짜리 건물 안에 편의점 세 개가 들어설 줄 누가 알았을까. 비슷한 시기에 세 편의점이 들어서자 주인들이 장장 3개월 동안 체인 편의점으로서 할 수 있는 호객 행위를 모두 하며 냉전을 펼쳤다고 한다. 그 3개월을 학생들은 삼국 전쟁이라고 불렀다. 모순적이게도, 갖은 수를 써 보아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결국 비슷한 수입이 나왔다. 결국 인간은 자본주의에 굴복했다. 반강제적으로 세 편의점이 평화로운 시기에 들어섰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세 편의점의 수입은 비슷하게 나누어떨어졌고, 이 기현상이 삼권분립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신입생으로 들어온 민규가 선배들로부터 저런 이야기를 들었을 적에는 그저 유치하다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민규는 어리석었다. 기숙사에 들어간 지 1주일 만에 편의점의 개가 될 운명에 처했던 것이었다. 급식만 12년을 넘게 먹었는데 학식만큼 맛없는 밥은 처음이었다. 세상에 먹을 게 학식밖에 없다고 가정할 때 울면서 겨우 넘길 맛이다. 같은 가격이라면 차라리 배가 덜 부르더라도 편의점을 찾아가는 것이 심리적으로 이득이었다.

 

  -

 

민규와 비슷한 이유로 몇몇 동기들이 휴학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민규는 휴학계를 내기도 전에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빌라촌 편의점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었다. 학생들이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앞다투어 찾아와서 점장님들을 차례로 붙잡고 남는 자리가 있느냐고 울상을 지었다. 어떤 날은 거의 열 명에 둘러싸여 곤란한 표정으로 서 있는 점장님들을 볼 수도 있다. 아무튼, 민규는 지옥의 경쟁률을 자랑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여유롭게 붙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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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 동안 집값이나 벌자고. 편의점 외에도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알아보는 와중에, 아주 사소한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는 편의점 단골손님과 직결되어 있었다. 아침 열 시에서 열한 시 사이, 밤 열 시에서 열두 시 사이. 가끔 그의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어 과자류를 쓸어 갈 때까지 합하면 하루 세 번을 다녀가지만, 우선 정해진 루트는 열두 시간 간격이다. 민규는 그 시간대만 되면 얼굴이 굳었다.

 

유리창 밖에서부터 눈치챌 수 있는 부스스한 머리만 보아도 민규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유리문에 붙어 있는 작은 종이 짤랑, 울리고 평균적인 사람들의 것보다는 조금 느린 발걸음이 얇은 슬리퍼 밑창에 질질 끌리며 신경이 곤두선다. 여닫이 냉장고 가장 아래 칸에서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른 맥주 몇 캔, 소주 한 병.

 

굳어 있는 민규의 얼굴을 조롱하기라도 하는 듯, 일부러 자기에게만 인사를 안 하는 것도 가소롭다는 듯 웃는 꼴이 얄밉다. 헝클어진 머리 아래로 희고 푸석한 피부에 자기주장이 심한 새까만 눈도 항상 피했다.

 

 “계산.”

 “또 라면이야. 밥을 먹는 꼴을 못 봐.”

 “해줄 거 아니면 좀 닥치지…?”

 “아침이면 담배 사 가고 저녁이면 술 사 가는 사람한테 내가 왜?”

 

잘 아네, 말보로 골드. 작은 컵라면 하나를 계산대에 내려놓으면서 원우가 턱짓을 했다. 민규가 신경질적으로 담배 한 갑을 꺼내고, 존대가 붙은 서술어도 없이 “오천삼백 원.” 하고 노려보아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원우는 편의점을 나간다, 재수 없는 새끼.

 

 

  -

옥탑방에 무작정 들어온 게 실수였다. 가장 싸게 주는 집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웃 정도는 알아보고 들어왔어야 하는데 낮이고 밤이고 시도 때도 없이 발코니로 올라오는 담배 연기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3일 정도 참다가 주인으로부터 연락처를 받아 문자를 보냈다. 문자에 답은 안 오고 담배 연기는 계속 올라와 전화를 걸었다. 잔뜩 화가 난 민규와 다르게 나른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원우와의 첫 만남 비슷한 것이었다.

 

 “윗집 사람인데요, 문자 받으셨어요?”

 “……네. 조심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아닌 것 같은데, 토를 달지도 못하고 망설이자 그대로 전화가 끊겼다. 다음날, 그 다음 날에도 창문 밖 공기보다 집안 공기가 더 맑았다. 민규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 아랫집 문을 두드렸다. 이사 온 지 열흘쯤 된 늦은 밤이었다. 피울 거면 나가서 피우라고, 그쪽은 늘 물고 사니까 연기가 향기로울지 몰라도 나는 아니라고. 민규의 언성이 높아지자 원우의 언성도 따라서 높아졌다. 적반하장이었다. 늦은 밤에 찾아와서 소리 지르는 게 잘하는 짓이냐는 말에 계단을 힘주어 밟으며 돌아왔다.

이후로 쭉 냉전이 계속되었다. 소중한 일터가 원우의 원픽 편의점인 것은 아르바이트 첫날 저녁에 알았다. 누가 누구한테 잘못을 따져, 이기적인 새끼. 민규는 남은 돈을 쪼개고 쪼개 공기 정화에 좋다는 식물들을 하나둘 발코니에 들였다. 원우가 스스로 자제하는 탓인지 식물의 영향인지 담배 연기가 줄었다. 신경을 써야만 맡을 수 있는 정도. 그러나 편의점에 아침저녁으로 들락날락하며 술담배를 봉지 가득 담아가는 원우를 마주할 때마다 민규는 잔뜩 심술을 부렸다.

한 달 반 동안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늘어진 티셔츠에 색깔만 다른 추리닝 바지가 기본 옵션. 밑창이 얇은 삼선 슬리퍼를 끌고 다니면서 아침이면 컵라면이나 삼각 김밥 정도에 담배 한 갑, 저녁이면 술을 한 아름 들고 오면서 담배 한 갑 더. 컵라면을 늘 작은 컵으로만 사는 것도 담배랑 술로 몸이 만들어져서 그렇다고. 민규는 일찌감치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빌라촌의 이웃들은 원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민규의 동기 혹은 선후배였다. 매번 원우의 그림자만 봐도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돌리는 민규에게 그들은 약이라도 올리려는 듯 원우의 정보를 흘렸다. 무슨, 작가라고 했던 것 같은데, 작업이랑 일을 같이 할 겸 내려왔다나. 작가 하려고 대학 중퇴했다더라. 얼마 전에 애인이랑 헤어졌대. 아! 그리고 해산물은 절대 못 먹는대.

 

 “아니, 그래서 어쩌라고?”

 

민규가 짜증을 내자 그냥, 그렇다고 따위의 답변과 쓸데없는 정보가 하나 더 머리에 들어왔다. 내적 친밀감이, 좋지 않은 계기로 점점 늘어났다. 분명히 좋지 않은 전개였다.

 

 “민규야, 원수를 사랑하래.”

 “네 원수한테 가서 말해.”

 

주입식 교육의 폐해다. 아주 좆같게도, 연말의 마지막 손님으로, 그리고 새해 첫 손님으로 원우가 편의점을 찾을 즘에는 완전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언짢았고, 싸운 날의 찌꺼기가 남아 있는 동시에, 정말로 해산물은 하나도 못 먹는지 같은 별 거지 같은 호기심이 싹을 틔웠다.

 

 “말보로 골드.”

 “……”

 “그렇게 쳐다보지 말고, 뭐라고 욕이라도 해 봐.”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

 “사과해야지 했어. 새해니까.”

 “자존심 더럽게 높네.”

 “…앞으로도 내 기준에서는 가끔. 그쪽 기준으로는 자주 실수할지도 몰라.”

 “더 나아질 일은 없다는 소리 아냐.”

 

참 이해가 안 가. 몸에 좋지도 않은 걸 왜 자꾸 사 먹어? 민규가 심드렁하게 작은 컵라면과 담배의 바코드를 훑었다. 곧이어 원우에게서 내 돈 내고 사 먹는 건데 무슨 상관이냐는 답을 들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 한숨이 우러나왔다. 그쪽 폐가 안쓰럽다. 우리 집 식물이랑 내 폐도.

 

 “유감이야.”

 “유감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니까 그렇지.”

 

검은 봉지를 원우의 품으로 휙 던졌다.

 

 “지난번부터 계속 반말이네?”

 “이제 와서 다시 예의 차려?”

 

원우가 쳇, 혀를 차는지 코웃음을 치는지 모를 소리를 냈다. 돌아서서 유리문 너머로 사라진 원우의 머리가 이내 유리창에 어른거렸다. 슬리퍼를 거칠게 끌며 팔랑거리는 옷자락까지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민규는 계산대에 털썩 앉았다. 성깔 부리기는…작가라는데 아무래도 생각이 짧지 싶다.

 

 ‘다 안 좋은 걸 자꾸 먹어서 그래.’

 

   -

 

조금 나아진 이웃 간의 친밀감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원우는 집에 한 번 틀어박히면 술담배가 떨어지기 전까지 편의점에 나오지 않았고, 민규는 하루마다 아르바이트 시간이 끝나면 다른 일거리를 찾아보거나 시내를 서성거렸다. 원우가 내려올 때면 늘 그렇듯 작은 컵라면보다 네 배는 비싼 담배를 집어 주었고, 캔맥주와 소주병을 한 아름 들고 오면 검은 봉지를 펼쳤다. 핀잔을 주는 것은 늘 같았다. 원우에게서 돌아오는 대답도 같았다. 다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냉전 상태가 아니라 일상적인 싸움으로 전세가 변해버렸다. 그렇게 대단할 것 없는 습관이 며칠 사이 들여졌다.

 

 “야, 민규야.”

 

창고에서 나온 점장님의 부름이었다. 멍하게 창밖을 보고 있던 민규가 두어 번을 더 부른 뒤에야 후다닥 달려갔다. 펜으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파일 언저리에 점장님의 손가락이 원을 그렸다.

 

 “수량이 안 맞아. 제대로 확인했냐?”

 “아……”

 

제대로 확인한다고 노력했는데. 민규의 머릿속이 짧은 순간 동안 기억을 휩쓸었지만 머리에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누군가 훔치려고 했으면 벌써 감시 카메라에 덜미가 잡혔겠지. 한두 병이면 실수할 수 있는데 네다섯 병이 차이가 났다. 자기 불찰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머리를 푹 숙이고 죄송하다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잠시만…”

 

하필이면 이런 때 나타나. 푹 숙인 고개 위로 열이 뻗쳤다. 우두커니 서 있는 민규의 앞으로 나아가 냉장고에서 맥주 몇 캔을 꺼내고 원우가 자신을 힐긋 보았다. 점장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었다. 나중에 놀려 먹으려고 그러냐? 민규의 이마에 습기가 찼다. 점장님은 또 소주 물량이 차이가 난다는 걸 미주알고주알 말해 주었다.

 

 “아, 죄송해요.”

 “네가 뭐가 죄송해?”

 “제가 그날 좀 취해서 실수했나 봐요.”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원우가 과장되게 다리를 탁 치며 사과하는 것부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술 약속 때문에 취해서 들어왔는데 습관처럼 편의점에 들어왔다, 민규한테도 원래보다 심하게 짜증을 부려서 등 떠밀리다시피 나왔다, 아마 그 와중에 계산이 제대로 안 된 것 같다. 맨정신이었던 민규의 기억에도 없는 이야기를 청산유수처럼 술술 풀어내 그랬던가, 하고 착각할 뻔했다. 원우가 다가오면서 옆구리를 비밀스럽게 찌르는 순간에 뒤늦게 눈치챘다. 민규를 올려다보며 원우가 픽 웃었다. 지금 이 사람 연기 하는 거야?

 

 “정확히 얼마가 비죠…?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변상할게요.”

 

안경 너머로 물 맞은 고양이 같은 눈을 뜨며 원우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길게 생각할 새도 없이 돈이 쥐여졌고, 펜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점장님이 자리를 떠났다. 부끄러움과 어색함에 원우에게 눈을 맞추지 못했다. 눈 좀 잘 떠봐, 얼굴께로 원우가 손을 뻗었다. 집에서 날 법한 알싸한 냄새와 담배 냄새가 민규의 코로 달려왔다. 50년은 찌든 것 같은 저 냄새만 없었으면 참 괜찮겠는데…아니, 이게 아니지, 이 멍청아. 볼을 콕 찌르는 원우의 손가락에 첫 번째로 당황, 불쑥 치고 들어오는 자신의 무의식에 연속 두 번을 당황했다. 맥락 없는 생각만큼이나 감정 없는 말이 민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연기 더럽게 못 하더라.”

 “이런 배은망덕한 새끼……. 저 가격만큼 술 사줘. 아니면 담배.”

 “이젠 내 돈으로 남의 몸 망치라고?”

 “안 좋게 들어갈 돈 서로 좋게 쓴 거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때마침 날짜를 세어 봤더니 오늘이 월급날이었다. 냉장고를 열어 원우가 자주 사는 맥주 캔과 소주병을 꺼냈다. 얼굴에 화색을 띤 원우가 이를 드러내고 방긋 웃었다. 공짜 술 먹으면서 그렇게 순수하게 웃는 건 반칙 아니야? 원우의 양손에 병을 쥐여 주고 민규는 품에 맥주 캔을 쌓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원우가 말보로 골드를 향해 턱짓했다.

 

 “안 돼. 술만 마셔.”

 “왜애! 오늘만큼은 그냥 못 본 척해라.”

 “내 손으로 집어 주는 걸 어떻게 모른 척 하냐?”

 

나도 술 먹을 거니까 그거 냉장고에 모셔 뒀다가 우리 집으로 와. 원우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올라가기 귀찮아.

 

 “흡연자가 좀 배려하자. 간접흡연보다 3차 흡연이 안 좋은 거 알지?”

 “알았어, 알았다고….”

 

원우가 듣기 싫다며 눈을 굴렸다. 무게 때문에 끊어질 것 같은 봉지는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 품에 단단히 봉지를 끌어안고 평소보다 살짝 빠른 발걸음으로 원우가 사라졌다.

  -

집에 들어간 지 5분도 안 되어 원우가 문을 두드렸다. 집에 들어오는 시간은 또 어떻게 알았대, 아, 나 옥탑방이었지. 문득 싸운 날 계단을 힘주어 밟고 올라갔던 기억이 났다. 무작정 거실 한가운데에 상을 펴 놓고 앉았다. 꽤 늦은 밤이었다. 편의점에서 원우가 상황을 무마시켜주었을 때보다 어색해서 민규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더니 혼자 상을 다 차렸다. 원우는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병을 팔꿈치로 탁 때렸다가 병을 휙 돌렸다가 하며 능숙하게 뚜껑을 열더니 잔 두 개에 술을 가득 채웠다.

 “짠,”

 “이 미친! 멀쩡한 소주잔 놔두고 왜 머그컵을 쓰는데?”

 “빨리 짠.”

원샷 안 하면 나 담배 피울 거야. 원우가 주머니를 톡톡 두드렸다. 내 집에서 피우게 내버려 두나 봐라. 원우의 주머니에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안 피워, 농담도 못 해. 원우가 머그컵을 다시 쥐었다. 그러니까 빨리 짠.

병과 머그컵이 쨍강하는 소리만 들렸다. 민규를 앞에 병풍처럼 세워 두고 원우는 빠른 속도로 잔을 비웠고, 민규는 그런 원우가 경이로웠다. 거의 다섯 번째 꽉 채운 머그컵을 입으로 가져갔을 때 민규가 원우의 손을 탁 잡았다. 저러다가 집에 업어서 데려다줘야 할 것 같은데?

 “그쪽, 원래도 그렇게 퍼마셔?”

 “……야,”

 “……”

 “나 취한 것 같지.”

 “…어, 그런 것 같네.”

푸석하던 피부는 술이 들어가자 몰라보게 탱글해졌다. 여기저기 떠 있던 머리는 촉촉해진 눈이나 발그레한 뺨 때문에 오히려 몽환적이었다. 밤이라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가 더 잠기면서 취한 것 같지, 하고 물어본다. 마신 술이 주량의 발치까지도 안 갔는데 민규의 머리도 알코올에 젖은 것처럼 새하얘졌다 일렁거렸다 했다. 마냥 기분이 좋은지 발그레한 뺨이 살포시 웃자 민규의 폐 언저리가 욱신, 하더니 간질거림으로 가득 찼다. 김민규, 민규야아. 말은 왜 질질 끌고 난리야.

 “쟤네들, 나 때문에 샀어?”

 “어. 냄새 덜 올라오던데.”

 “일부러어 이거 보여 주려고 불렀지이.”

 “그건 아니고,”

 “아아 됐어어. 기분 나빠서 담배 끊을래애.”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전원우 진짜? 민규가 귀를 의심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눈을 문지르며 하품을 하는 원우에게 카메라 초점을 맞추고 급하게 녹화 버튼을 눌렀다. 다시 말해 봐, 휴대폰을 얼굴에 가져다 대자 원우가 왜 찍어! 하며 얼굴을 피했다. 원우의 뒤통수에 대고 살살 구슬렸다. 야밤에 취한 사람 붙들고 뭐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한동안 놀릴 생각을 하니까 민규의 광대가 천장을 향해 치솟았다. 내일, 아니, 열두 시 지났으니까 오늘부터 끊을까? 하는 말에 원우가 방싯방싯 웃다가 꼬이는 발음으로 ‘아라써어!’ 하고 대답한다. 민규의 입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흡족하게 영상을 저장하고 휴대폰을 멀리 떨어진 소파에 던졌다.

 “민규야아, 김민규, 근데”

 “그런데?”

 “나 벌써 담배 피우고 싶어...”

 “야아, 안 돼. 끊기로 약속 했잖아.”

입이 막 간질간질한데 어떡해. 원우가 손끝으로 자기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그러면서 다른 손을 주머니 안에 넣으려고 해 민규가 급하게 양쪽 손을 잡아챘다.

 “지금은 안 돼. 내일 밖에서 피워.”

 “입 심심하단 말이야. 네가 내 기분을 알아? 아냐고오!”

미친, 담배 버릇만 심한 게 아니라 술주정도 심하네! 원우의 몸이 팔랑팔랑 흔들리다가 민규의 품으로 엎어졌다. 훅 들어오는 원우의 무게에 당황해서 민규 역시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원우에게는 넘어지는 충격이 가지 않았는지 몸 위에 엉금엉금 올라앉고는 민규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인다. 진한 술 냄새에도 원우에게서 나는 알싸한 냄새가 가려지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까아, 내가 손해네.”

 “뭐가 손해야. 돈도 아끼고 오래 살 텐데.”

아니야. 가슴팍에 원우의 얼굴이 툭 떨어졌다. 쇄골과 목에 원우의 머리칼이 살랑거렸다. 살짝 틈이 벌어진 옷 틈새로 술기운에 열이 오른 살이 닿았다. 가슴팍에서 원우가 입을 오물거렸다. 그러더니 살을 부비며 올라오면서 어깻죽지에서 쪽쪽, 목을 타고 올라오면서 입술을 연거푸 찍어내더니 어떤 상황인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 민규의 입술마저 진득하게 빨아들였다. 민규의 눈이 커졌다가, 입술을 몇 번 움직이다가, 그대로 감겼다.

 ‘나도 취했나 봐. 취했지, 단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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